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참 나를 찾아서(5)
독일이 낳은 천재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종교의 본질을 ‘성스러움(Das Heilige)’으로 보았다. ‘성스러움’이야 말로 종교를 형성하는 종교 본질의 고유한 영역이다. 모든 종교의 본질은 도덕적 범주를 넘어서는 ‘누멘적인 감각(sensus numinis)’에서 출발한다. 종교는 언제나 두 가지 과제 앞에 놓여 있다. 하나는 ‘정체성(identity)의 과제’이고, 또 하나는 ‘상관성(Relevance)의 과제’이다. 이 두 과제는 언제나 상호 긴장 관계 속에서 전개된다. 정체성을 강조하다 보면, 세상과 소통해야 하는 상관성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또한 반대로 상관성에 집중을 하다 보면, 종교 고유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누를 범하게 된다. 이것은 종교적 존재로서 개체 인간과 종교적 공동체인 교회 공동체에 공히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빠르게 전개되는 현대화, 세속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점점 종교가 자신의 고유의 영역인 ‘성스러움’곧, ‘거룩함’을 잃어가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소위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라고 말한다. ‘자기다움’의 상실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다섯 번째 신학적 의미는 ‘거룩한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거룩’(카도쉬)이란 단어는 구약성서 안에 무려 830번 이상이나 등장한다. 최초의 기록은 창세기 2장 3절에 등장한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특정한 날을 거룩하게 성별하셨다는 말씀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하나님 자신이 거룩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거룩은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11:45).“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따라 흠이 없는 거룩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서 인간은 그 거룩함을 상실하고 말았다. 실낙원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인간이 그 거룩함을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룩함으로 정의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살전4:3-8).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성도와 교회가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이다. 거룩한 삶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영국 국교회 주교였던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1613-1667)는 기독인의 생애를 거룩의 관점에서 조명했다. 그의 명저『거룩한 삶』과 『거룩한 죽음』은 그 결과이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거룩함(Holiness) 혹은 성화(Sanctification)을 그의 감리교 운동의 내용과 목표로 삼았다. 기독교 교회론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독일의 천재 신학자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1768~1834)는 그의 명저『종교론』 (Über die Religion)과 『신앙론』(Der Christliche Glaube)에서 거룩함(Das Heilige)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시작과 끝임을 설파하였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신을 맛보는 종교 경험은 곧 인간의 이성과 도덕을 넘어서는 초월적이고 신비로운 거룩한 체험이다. 기독교 교회의 본질은 ‘거룩함’에 있다. 내적인 거룩함을 회복할 때 비로소 외적인 성화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전자를 내적 성화(Inner Holiness)라고 하고, 후자를 외적 성화(Outer Holiness)라 한다. 내적인 성화가 없이는 결단코 외적 성화가 없다. 그러므로 외적 성화에 문제가 있으면 가장 먼저 우리의 내적 성화를 성찰해야 한다. 그곳에 문제를 해결할 궁극적 답이 있다.
거룩이 능력이다. 교보 추천도서로 선정되었던 청년 설교집 『하나님의 미래』에서 필자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문제를 해결할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이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렇다. 지금은 우리가 잃었던 거룩함을 회복할 때이다.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셨던 한 가지는 바로 거룩함이었다. 레위기(Leviticus)는 그것을 위한 안내서이다. 레위기 전체의 영적 주제는 ‘성결(Holiness)’과 ‘희생(Sacrifice)’과 ‘속죄(Atonement)’이다. 레위기를 통과하지 못하면 결코 가나안의 꿈을 이룰 수가 없다. 광야의 시간을 뚫고 나갈 진정한 힘은 바로 레위기에 있다. 여호수아는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꿈을 가로막는 범람하는 요단강 앞에서 여호수아는 삼일간의 ‘거룩한 정지’를 선언하며, 백성들에게 철저한 성결작업을 명한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3:5). ‘오늘’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면, ‘내일’ 하나님의 미래의 문이 열릴 것이라는 믿음이 여호수아에게 있었다. 그 믿음은 요단을 도하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되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비빔밥을 좋아한다. 가끔 청솔 보리밥 집을 찾는다. 참기름, 고추장, 된장, 그리고 갖가지 나물들을 넣고 보리밥을 비비면 아주 오묘한 맛이 난다. 비벼먹기 편하게 양은으로 만든 큰 그릇이 나온다. 그곳에 비비면 그 맛이 더 일품이다. 아무리 금으로 만들어진 그릇이라도 그곳에 오물이 담겨 있고 악취가 난다면 누가 그 그릇을 사용하겠는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거룩한 생각, 거룩한 말, 거룩한 습관, 거룩한 삶이 회복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 받게 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
위대한 일을 하기 위해서 위대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거룩한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었던 우리 안의 거룩함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친히‘임마누엘,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십자가는 거룩함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가 아니라, 가장 낮고 천한 말구유에서 실낙원의 비극을 초극하는 복낙원의 거룩한 문이 열린 것이다. 이 땅의 교회와 성도의 삶의 자리에 잃었던 거룩함의 형상이 회복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