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상상력으로 기독교 경전읽기
창조의 아름다움 : 참 나를 찾아서(2)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두 번째 신학적 의미는 인간은 사랑의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존재이시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전해준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8). 사랑은 하나님의 존재의 속성이자 하나님 그 자신을 나타내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유함 없이는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논할 수 없다.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통해서 이뤄져 왔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속성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 속성상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가 되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랑은 인간을 참으로 인간되게 한다. 사람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힘도 사랑에서 온다. 사랑이 없다면 바로 그곳이 지옥일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 때문에 살아가고 있고, 또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다. 사랑은 오늘을 살게 하는 힘이다. 사랑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다. 사랑은 삶의 의미이다.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만약 누군가 이 하나님의 선물을 상실해 버린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모든 문제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랑의 부재가 있다. 현상적으로 보기에는 이런 저런 문제들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모든 갈등과 반목과 분열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랑의 부재가 있다. 미국의 저명한 작곡가인 엑셀(Edwin Othello Excell, 1851~1921)은 사랑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노래하였다.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 받기 원하네 어떤 이는 고통과 근심 걱정 많으니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 하도다”(찬송가503). 우리의 내면에 잃었던 사랑의 형상이 회복될 때 비로소 행복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구원은 사랑이 회복될 때 일어나는 축복의 공간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지혜자는 말한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 사도 바울은 말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잃었던 사랑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갈등과 반목과 증오와 시기로 얼룩진 우리네 삶의 자리 속에 사랑의 불꽃으로 오셨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고자 끌고 나왔다. 그리고 예수에게 물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 여인을 돌로 치라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는가? 예수는 잠시의 침묵 후에 여인을 정죄하기 위해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듣고 모두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젊은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을 내려놓고 그녀 곁을 떠났다. 예수는 그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정죄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예수는 그녀를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누가 있는가? 허물이 없는 자가 어디 있는가? C.S 루이스의 말처럼 우린 모두 하나님 앞에서 ‘끔찍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인의 반열(Justification)에 올랐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만 인간은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인간이 사랑의 형상을 상실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죄’ 때문이다. 죄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 행복의 꽃으로 빛나는 사랑의 진주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사랑의 진주를 위하여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종의 몸으로 주님이 오셨다. 밀턴은 인간의 타락을 노래한 『실낙원(Paradise Lost)』과는 달리 그의 명저『복낙원(Paradise Regained)』에서 낙원의 회복을 이렇게 노래한다. “내 일찍이 행복의 동산을 노래하였도다 / 그것은 한 사람의 불복(不服)으로 인하여 잃은 것 / 내 이제는 노래하노니 온 인류에게 낙원을 / 돌이켰음을. 그는 또 한 사람의 확고한 순종에 의하여 / 온갖 유혹을 넘어서 충분히 시련을 받아 / 유혹자는 그의 모든 간계가 드러나 패하고 / 배척을 받아, 에덴은 황막한 광야에 서게 되었도다.” 밀턴은 『실낙원』을 이렇게 끝맺는다. “사탄의 정복자여, 그대 영광의 위업에 이제 / 오르시라. 그리하여 인류의 구원을 시작하시라 / 이렇게 저들은 신의 아들, 온유한 우리 구세주를 / 승리자로서 찬미하고 하늘의 성찬으로써 / 신선케 하며, 기쁨으로써 그의 길로 인도하였다 / 그는 남모르게 어머니 집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기독교 영성은 인간을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한다. 하나는 본래적인 인간(Original human being)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기 이전의 인간의 상태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의 인간 본성을 지닌 존재이다. 또 하나는 옛 인간(Old human being)이다. 죄로 인하여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인간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왜곡되거나 상실되어버린 상태의 인간 본성을 지닌 존재이다. 마지막은 새 인간(New human being)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인간 본성을 지닌 존재이다. 아기 예수의 오심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인 이유가 여기 있다. 평생을 살아도 본래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이 있다.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된다. 잃어버린 사랑은 사랑으로만 다시 찾을 수 있다. 예수는 그 사랑의 화신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1:12)고 외쳤다. 이 복음의 소리가 온 인류에게 더 큰 사랑과 구원의 메아리로 울려 퍼지길 소망해 본다.